판소리 복서(My Punch-drunk Boxer) 관람 후기
판소리 복서의 티저를 보고 처음엔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다. 병구(엄태구役)가 국악 장단에 맞춰 판소리 복싱으로 이기고 성장하는 뭐 그런 성장 드라마일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트위터랑 유튜브에서 원작 단편 영화 관련된 리뷰1를 정말 잠깐 봤는데, 그땐 “이건 무슨 괴작이지??” 했다. 나이트클럽 앞에서 갑자기 난데없이 장구를 치지를 않나,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 질 않나….
진지하게 웃기는 그런 영화인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기록으로 남겨볼까 한다.
배우 엄태구의 존재감
엄태구 배우는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그를 처음 본 영화는 베테랑인데, 처음엔 배우가 아니라 진짜 격투기 선수 출신이 캐스팅된 줄 알았는데 배우였더라. 선 굵은 외모와 연기가 너무 인상 깊었다. 택시운전사에서는 검문 중인 군인 역할로 짧게 나왔지만, 그때도 어김없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역사적인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라 그런지-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그 장면을 보며 이름 모를 개인이 겪었을 고민과 갈등을 상상하고, 그런 사람들이 진짜 역사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연이 아닌 주연
티저2를 보고 판소리 복서가 코미디 영화일 거라고 내 멋대로 확신했다. 조연으로 등장했던 두 편의 영화가 너무 인상 깊어서 그랬는지 주연 엄태구의 코미디 연기를-내 맘대로-기대했다. 선 굵은 외모와 연기력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웃음이 빵빵 터질 거라 굳게 믿었다. 그건 심각한 착각이었다.
영화는 내 기대를 배신했다. 전혀 가볍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판소리 장단에 맞춰서 복싱한다는 것만으로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상상했는데 그런 설정마저 나중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단 이 영화는 악역이 없다. 얄미운 사람은 있어도 나쁜 사람은 없다. 악역 연기로 인상 깊은 김희원 배우가 악역이 아닌 것 만으로 이 영화를 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혜리 최고다. 연기도 진짜 잘한다. 장구도 진짜 잘 친다. 게다가 키스신도 있다!!!!!
어쩌면 스포일러가 들어있을지도 모릅니다. (클릭)
병구의 몇몇 대사가 인상 깊었다.
“시대가 끝났다고 우리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고장 나면 고치면 되잖아. 왜 그냥 버려..”
신규 관원이 없는 체육관, 고장 난 TV, 강아지 포먼의 죽음, 폐업을 준비하는 사진관, 재개발, 병구의 마지막 시합 모두 영화 속에서 시대의 종말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강아지와 고장 난 TV에서 병구는 자기 자신을 본 게 아닐까? 자기도 자기 삶도 망가지고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다시 고칠 방법이 있지 않겠냐는 외침으로 들렸고, 병구가 찾은 그 방법은 다시 판소리 복싱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병구의 마지막 시합은 해피엔딩을 끝나지 않는다. 경기가 잡힌 후 훈련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줘서 내심 이기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이기지 못한다. 시합 당일, 상대는 같은 체육관에 있었던 교환(최준영)이었다. 둘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생각하면 경기 전 감정 섞인 반응들이나 이야기 진행도 할법한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짧은 훈련으론 교환과의 실력 차를 좁힐 수 없었고, 민지의 응원을 받으며 판소리 복싱으로 교환을 코너에 모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바닥에 다운되며 경기가 끝난다. 내심 주인공이 이기는 그런 걸 기대했는데 내 기대를 저버려서 너무 다행이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전혀 행복한 엔딩으로 느껴지지 않은 건 아무래도 병구가 민지의 죽음을 잊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 내내 지연(이설)은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데, 처녀 귀신 이미지가 떠올랐다. 영화 종반부로 가면서 지연의 죽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로 지연의 집은 영화 초반부에도 나오는데, 전단을 돌리다 잠시 어느 집 앞을 서성거리다 그냥 가는데 그 집이 지연의 집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박 관장의 체육관에 사람이 가득하고, 벽 한쪽엔 병구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었던 것을 하게 되면서 얽매였던 과거에서 벗어났으니 병구는 분명 행복해야 하는데 병구를 보는 내 마음은 너무 슬펐다. 펀치드렁크를 앓고 있는 병구, 지연의 죽음을 잊은 병구의 모습을 자꾸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옛날에 한 여자가 살았고, 한 남자가 살았고, 오랫동안 행복했다고 말하는 병구의 말처럼 병구와 민지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족인데, 영화에서 민지가 자기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별로인 남자만 만났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엔딩크레딧에 보면 민지 전 남자 친구가 있다! 편집된 것 같은데, 쓰레기 같은 전 남자 친구랑 병구랑 대조되는 그런 점이 있어서 민지가 병구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VOD 나오면 또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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